정부, 반도체 초과세수 5조원 '소버린 AI'에 쏜다 — GPU 1만 개, 한 팀에 몰아준다
정부가 반도체 초과세수 5조 원으로 최신 엔비디아 베라 루빈 GPU 1만 개를 구매해, 여러 팀에 분산 지원하던 기존 방식 대신 한 팀에 집중 투자하는 방식으로 미토스급 소버린 AI 모델 개발에 나서기로 했으며, 이는 6월 페이블5·GPT-5.6 수출통제 사태가 남긴 위기의식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는 소식입니다.
정부가 반도체 호황으로 예상보다 더 걷힌 세금(초과세수) 중 약 5조 원을 투입해, 앤트로픽의 미토스급 독자 인공지능(AI) 모델을 개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경제 단독 보도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 예산으로 엔비디아의 최첨단 GPU '베라 루빈(Vera Rubin)' 슈퍼칩 약 1만 개를 연내 사들이고, 세계적 수준의 이른바 '소버린(주권) AI' 모델 개발에 나설 계획입니다. 정규 예산 편성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판단해, 올해 안에 추가경정예산(추경)으로 확보하는 방안을 청와대·재정당국과 논의 중이라고 합니다.
이 소식이 특히 눈에 띄는 이유는 정책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여러 팀에 나눠주던 지원금을, 이제는 단 한 팀에 GPU 1만 개를 몰아주는 방식으로 전환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게 됐을까요. 배경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직접적 계기 — 3일 만에 벌어진 '접속 차단' 사건
이 결정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이미 이 블로그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지난 6월 9일, 앤트로픽이 미토스 기반의 페이블 5(Fable 5)를 공개하자 국내 여러 기업이 곧바로 이 모델과 자사 프로그램을 연동해 AI 에이전트를 개발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단 사흘 뒤인 6월 12일,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페이블 5의 외국 접속을 전면 차단했습니다. 페이블 5로 시스템을 짜던 국내 기업들은 계획을 통째로 다시 짜야 했고, 곧이어 오픈AI의 GPT-5.6도 비슷한 통제를 받으면서 "AI 모델이 국가 전략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국내 산업계에 퍼졌습니다. 한경 보도에서 한 대기업 관계자는 "앞으론 이런 일이 상시화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정작 이 수출 통제 자체는 지난 6월 30일 전면 해제됐다는 사실입니다. 즉 사태 자체는 18일 만에 일단락됐지만, 그 사이 정부는 "남의 모델에 의존하다가는 언제든 이런 일을 다시 겪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위기는 지나갔어도, 그 위기가 남긴 정책적 교훈은 그대로 남은 셈입니다.
기존 '독파모' 프로젝트, 왜 한계에 부딪혔나
한국 정부는 이미 작년부터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독파모)' 프로젝트를 운영해왔습니다. 1차 심사를 거쳐 LG AI연구원·SK텔레콤·업스테이지·모티프테크놀로지스 4개 팀이 선정돼 정부의 GPU 지원을 받아 모델을 개발 중입니다.
문제는 지원 규모입니다. 4개 팀에 나눠준 GPU는 팀당 700~800개 수준이고, 앞으로 2개 팀으로 좁혀져도 각 2000개에 그칩니다. 반면 오픈AI는 GPT-4에 A100 기준 약 1만 개, GPT-5에는 약 2만 1000개를 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원을 여러 팀에 나눠 경쟁시키는 지금 방식으로는, 애초에 자원 규모 자체가 글로벌 최상위권과 비교가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접근 — '내부 경쟁'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이번 계획의 핵심은 바로 이 구조를 뒤집는 데 있습니다. 과기정통부는 확보한 GPU 1만 개를 여러 팀에 분산하지 않고, 가장 유력한 한 팀에 전부 몰아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선정 기준은 기존 독파모 프로젝트 성과 점수, AI 기술력, 그리고 해당 기업이 정부 지원에 맞춰 얼마나 공동 투자할 의지가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평가한다고 합니다. 하드웨어뿐 아니라 해외로 유출된 국내 최고 AI 인재를 다시 데려오는 데 쓸 예산도 이번 추경에 함께 담길 예정입니다.
'베라 루빈'이 어떤 칩이길래
이번 계획에서 사려는 베라 루빈은 아무 칩이나 고른 게 아닙니다. 앞서 엔비디아가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 공급한다고 밝힌 '베라' CPU를 이 블로그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베라 루빈은 그 베라 CPU와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 '루빈(Rubin)'을 하나로 묶은 완성형 패키지입니다. 슈퍼칩 하나에 베라 CPU 1개와 루빈 GPU 2개가 초고속 연결망으로 묶여 있고, 루빈 GPU는 최신 고대역폭 메모리(HBM4)를 탑재해 이전 세대인 블랙웰보다 최대 2.8배 빠른 데이터 처리 속도를 냅니다. 엔비디아는 이 플랫폼을 특히 **에이전틱 AI(스스로 계획하고 도구를 쓰는 AI)**에 최적화했다고 설명하는데, 올해 1월 공개돼 하반기부터 본격 양산에 들어가는 그야말로 최신 세대 칩입니다. 즉 한국 정부가 사려는 것은 구형 재고가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구글 같은 빅테크가 지금 막 도입을 시작한 것과 같은 세대의 하드웨어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한경 보도가 짚은 국제 비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중국의 딥시크·즈푸AI 같은 기업들은 미국이 자국 AI 모델 수출을 통제하는 사이, 오히려 소스를 공개하며 미국 외 시장 점유율을 넓히고 있습니다. 반면 스탠퍼드대가 선정한 '2025년 주목할 만한 AI'에는 한국 모델이 8개나 이름을 올렸지만, 자원이 여러 팀에 분산된 탓에 정작 질적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흥미로운 대조군은 프랑스입니다. 단 1개 모델만 이 명단에 올랐지만, 그 모델(미스트랄AI)은 프런티어 모델 성능 순위에서 메타를 제치고 세계 7위에 올랐습니다. 모델을 많이 만드는 것보다, 자원을 집중해 한 곳이라도 확실한 경쟁력을 갖추는 쪽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시사점입니다.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지점
이번 계획을 보는 시각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우려하는 쪽은 '속도'를 지적합니다. 국내 한 AI 전문가는 한경 인터뷰에서 "앤트로픽 등 선도 기업의 최고 모델 수준이 압도적이어서 한국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이른 시간 내 따라잡지 못하면 AI 종속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실제로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달 26일 "GPU가 점점 대규모로 필요한데 확보 속도가 너무 느린 것 아니냐"고 언급하며 추경 편성 시 관련 예산 확보를 주문한 바 있습니다.
반면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투자의 성격'에 주목합니다. 한 반도체학과 교수는 "AI 붐에 따라 하드웨어로 번 달러를 소프트웨어 경쟁력 강화에 투입하는 건 국가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반도체 수출로 거둔 세수를 다시 AI 산업에 재투자하는 구조 자체는 합리적이라는 시각입니다.
관전 포인트 — 앞으로 무엇을 지켜봐야 하나
이 계획이 실제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몇 가지 변수에 달려 있습니다. 먼저 추경 편성 여부와 시기입니다. 정부 부처 내부 논의 단계인 만큼, 실제 예산이 확정되기까지는 국회 심의 등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다음으로 어느 팀이 선정되느냐입니다. 기존 독파모 4개 팀(LG AI연구원·SK텔레콤·업스테이지·모티프테크놀로지스) 중 한 곳에 자원이 집중될 텐데, 선정 기준에 '공동 투자 의지'가 들어가는 만큼 각 기업이 얼마나 추가 투자에 나설지도 변수입니다.
또 하나 짚어볼 점은, 이 계획이 지난 6월 29일 발표된 정부의 '3대 메가프로젝트' AI 데이터센터 투자(2035년까지 1000조 원, 18.4기가와트)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계획이 SK·GS·네이버 등 민간 기업이 짓는 데이터센터 '건물과 전력' 인프라 전반을 가리켰다면, 이번 5조 원은 그중에서도 특정 프런티어 모델 하나를 개발하는 데 쓸 GPU 구매 예산입니다. 인프라를 넓게 까는 계획과, 그 위에서 실제로 최상위급 모델 하나를 만들어내려는 계획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셈입니다.
정리하며
이번 소식의 핵심은 단순한 예산 증액이 아닙니다. 자원을 나눠주는 '공정한 경쟁'에서, 한 곳에 몰아주는 '승부수'로 국가 AI 전략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배경에는 지난달 벌어졌던 수출 통제 사태가 남긴, "언젠가 다시 접속이 끊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남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GPU 1만 개를 한 팀에 몰아준다고 해서, 이미 수만 개를 굴리는 글로벌 프런티어 기업들과의 격차가 실제로 좁혀질까요? 그리고 '선택과 집중'이 가져올 성과가, 탈락한 나머지 팀들의 역량 손실보다 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추경 편성 여부가 확정되고 실제 선정 팀이 발표되는 다음 몇 달이, 이 승부수의 성패를 가늠할 첫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이 글은 한국경제 단독 보도(2026년 7월 2일, 박한신·이영애 기자)를 바탕으로, 엔비디아 공식 자료 등을 참고해 작성되었습니다.